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퀴리 (문단 편집) === 남편의 죽음 === 비가 내리던 1906년 4월 19일, 피에르가 마차 바퀴에 깔리는 교통사고로 [[즉사]], 만 46세[* 47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.]로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났다. 딸 에브 퀴리[* [[피에르 퀴리|아빠]]의 마차 사고 당시 불과 생후 16개월이었다.] 가 쓴 전기에는 바퀴에 머리가 깔려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. 어린이 위인전에조차 '부서진 머리뼈에 붕대를 감았다'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. 피에르는 아침에 대학으로 출근하던 길이었으나 당시 비가 와서 앞이 잘 안 보였고,[* [[파리(프랑스)|파리]]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연중 강수량이 일정한 대신 일년내내 비가 주룩주룩 오고 날씨가 우중충하곤 한다.] 화물마차를 운전하던 마부는 [[음주운전|술이 덜 깬 상태였다.]] 마부는 횡설수설하여 어느 미친 놈이 자살했다는 둥 헛소리를 했지만, 사고현장에서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[[노벨상]] 수상자와 닮았다고 증언하자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[[피에르 퀴리]]임을 확인했고, 이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팼다고 한다. 경찰들이 막지 않았으면 정말 죽었을 것이라고. 이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.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[[음주운전]]에 해당[* 그것도 국가적 영웅이자 세계구급의 뛰어난 학자를 죽음으로 이끈 대형사고. 당시 법원 밖에서는 그 마부의 목을 자르라는 항의까지 있었다.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[[사형]]을 [[단두대]]로 [[참수]]했기 때문에 결국 사형시키라는 뜻이다. 그나마 마부가 일부러 한 짓이 아니어서 사형만은 면했던 것. 무기징역으로 살던 마부는 1928년에 [[옥사|교도소에서 죽었다]]. ]되기 때문에 자업자득이지만. 피에르의 죽음을 경찰에게 연락받은 대학 측 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부인에게 어찌 전해야하느냐며 난감해했다. 결국 피에르와 친하게 지내던 대학교수 동료들이 직접 집으로 가서 마리에게 참사를 이야기했고, 당연히 마리는 미치도록 슬퍼했다. 지금은 단종된 [[프랑스 프랑]] 500프랑에 마리 퀴리와 함께 [[피에르 퀴리]]도 그려져 있었는데, 그 왼쪽에 있는 마차는 마리가 고안한 방사능 물질 운반차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